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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의미들

 

최지영 개인전 <경계>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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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미술비평가)   

 

최지영은 몸을 만드는 조각가이다. 이때 몸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몸이다. 그리고 흙으로 빚어 불로 구운 인간의 몸이다. 그는 조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홍익대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인체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 왔다. 초기에는 레진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인체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일찌감치 흙이라는 재료를 고집하며 테라코타 인물상을 꾸준히 만들어 왔다. 남성과 여성, 유년과 노년, 청년과 장년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형상의 인체가 그의 작품세계의 시민들이다. 이들은 각자가 할당받은 자리에 고립되어 있는 듯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리지어 일정한 공간을 점유한 군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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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가 모두 한 명의 개인이면서 또한 여러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듯이, 마찬가지로 최지영의 조각들도 홀로 머무는 동시에 함께 모여 있는 인물들로 보인다. 자기 자신으로 수렴하는 개별적 존재이면서 또한 임의의 공동체로 발산하는 사회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제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에 무사히 안착한 개인들이 있는가 하면, 사회의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걸쳐 있거나 심지어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린 개인들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가 모든 이에게 잘 작동하는 안전한 울타리인 것은 아니다. 어떤 공동체는 누군가에겐 진입을 불허하는 성벽으로 여겨지고, 또 누군가에겐 이탈할 수 없는 담장으로 다가온다. 사실 최지영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관계를 사유한다. 조각가로서 그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몸은 경계의 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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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온전히 속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우리 각자는 모두 집단의 통념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의 고유한 의견을 갖고 있으므로 저마다 공동체와 어긋나는 부분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최지영의 <경계인(境界人)> 연작이 보여주는 통찰이다. 이 연작의 벌거벗은 몸들은 그 일부가 다른 색을 띠고 있다. 예컨대, 이들의 몸은 흰색이지만 가슴이나 등은 검은색을 띠고 있고, 반대로 몸의 색은 짙지만 다리나 배의 색은 밝다. 신체의 일부가 그 나머지와 전혀 다른 색을 띤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배척당하기 쉬운 돌연변이와도 같다. 다행스럽게도 그 부위가 얼굴이나 손이 아니라 옷으로 가려질 수 있는 곳들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한 사회에 속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지만, 최지영이 흙으로 빚은 이 경계인들은 벌거벗은 상태이므로 그 추방의 낙인 같은 얼룩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이들은 특이한 신체를 지닌 몇몇 인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타자와 더불어 사는 인간 전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우리 모두는 외견상 별다른 기벽 없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어엿한 사회인의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일 때조차도 결코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얼룩진 욕망이나 일그러진 기억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최지영은 그렇게 사회 내에서 손쉽게 부정되거나 숨죽여 작동되는 욕망과 기억을 성찰하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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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몸은 벌거벗은 몸이다. 갖춰 입은 몸은 문화의 기준에 따라 연출된 몸, 타자의 시선에 맞춰 변장된 몸이다. 반면에 벌거벗은 몸은 문명과 자연, 이성과 본능, 타자와 자아의 경계에 놓인 인간의 존재 조건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최지영은 벌거벗은 인간의 몸을 일관되게 조각하는 것이다. 물론, 갖춰 입는다는 것이 반드시 옷으로 알몸을 가린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같이 벌거벗은 몸일지라도 어떤 몸은 사회가 요구하는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갖춰 입은’ 획일화된 몸으로 제시된다. 최지영의 조각 설치작품 <경계(境界)>는 무대 위의 군상들처럼 보인다. 육면체의 공간 속에 여러 벌거벗은 인체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무리지어 서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여럿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은 동일한 남성상과 여성상이 복제되어 만들어진 무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데 모여 하나의 집단을 이룬 개인들처럼 보이지만 같은 얼굴과 같은 자세를 지닌 복제물들일 뿐이다. 즉, 이들은 집단 속에서 안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가장 평범하고 가장 무난한 표정과 처신으로 스스로를 드러낸,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감춘 이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스스로를 드러낸 인물들은 이 무대 같은 장치의 주변부에 자리한다. 육면체의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보이는 몇몇의 역시 벌거벗은 인체상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기준을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다른 사고와 다른 욕망을 지닌 까닭에 집단 속에서의 삶을 일종의 벽처럼 경험하는 자들이다. 비록 집단의 틀에 가로막혀 있지만 무대 중앙의 무리들과 달리 힘있는 포즈로 발버둥을 치는 자들이다. 한편, 무대 안쪽 벽의 상단에는 한 여성 인물상이 매달려 있다. 배덕의 본보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성한 우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 여성상은 획일화된 집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분리시킨 또 다른 경계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최지영은 이 조각 설치작품을 통해 경계의 공간적 배치를 탐구한다. 천편일률적인 도상의 인물들이 무대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반면, 집단의 기준과 불화하는 경계인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경계인의 공간은 주변적 장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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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영의 작품은 조각가가 경계에 대해 사유하는 여러 방식을 예증한다. 이때의 경계는 다양한 의미의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경계인(境界人)>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경계의 일차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이다. 인간의 경우에 이 경계는 사회나 집단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경계인이란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최지영의 통찰은, 경계인이란 특정한 종류의 인간들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존재 조건임을 드러내는 데 있다.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인 것이다. 다만 어떤 이들은 이를 애써 외면하면서 획일적인 얼굴과 순응적인 신체를 추구하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얼룩진 몸과 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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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최지영이 제시하는 첫 번째 의미의 경계라고 한다면, 이로부터 그는 동음이의어의 유희에 기반을 두고 그의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의미의 경계로 나아간다. 그의 또 다른 설치작품 <경계(警戒)>에서의 경계는 한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이 기준과 한계가 아니라 조심하고 단속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때의 경계는 ‘경계인의 감정’과 ‘경계인에 대한 감정’을 함께 가리킨다. 사실 이 두 감정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최지영의 작품세계 속에서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경계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이들은 그 속성을 자의든 타의든 노출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향이 더 강화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은 가시적인 경계인을 폭력적으로 부정하는 데 이르기도 한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증오,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보란 듯이 내뱉는 이들의 거친 폭언과 폭력은 결국 자기 부정의 제스처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 인간 모두를 관통하는 경계의 감정은 불안과 다르지 않다. 경계인으로 낙인찍힌 벌거벗은 사람들도, 획일화된 사고와 품행을 내면화한 사람들도, 경계인을 감시하고 축출하는 자경단을 자처한 사람들도 모두 마음 깊은 곳의 불안에 휩싸여 있다. 모두가 현실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집단의 기준에서 벗어나 경계로 내몰릴 가능성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지영의 <경계(警戒)>는 이와 같이 가해자와 피해자, 엿보는 자와 숨은 자를 구별하기 어려운 인물상들을 배치한 설치작품이다. 이 인물상들은 경계를 멈출 수 없다. 저 멀리 보이는 실루엣이 자기를 보호하는 개인지 자기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지영이 이 설치작품의 부제로 제시하듯이, 경계인의 장소가 주변적 공간이라면 경계인의 시간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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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적 공간, 개와 늑대의 시간, 즉 어떤 문턱의 시공간이 최지영이 조각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동시대의 풍경이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또는 이편과 저편이 겹친 문턱의 시공간 속에서 경계인들이 산다. 작가가 이들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조각적 기법은 테라코타이다. 흙으로 형상을 빚은 후에 가마에 구워서 만든 이 벌거벗은 신체들은 필연적으로 우연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아무리 모든 과정을 철저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가마에서 구워지는 시간 동안의 사건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한 변색, 의도치 않았던 부분에 생기는 균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형태의 왜곡이나 파열이 발생하는 것이 테라코타 기법의 특성이다. 최지영은 이렇듯 우연을 긍정하는 기법을 통해 내부와 외부, 이편과 저편, 다수와 소수를 구별하는 문턱이 어떤 필연적이고 타당한 근거를 토대로 성립한다기보다는 권력과 욕망, 군중심리와 불안감정에서 기인하는 우연의 결과임을 드러내는 듯하다. 

다른 한편, 전통적인 의미에서 조각은 뚜렷한 경계를 전제하는 예술 장르였다. 그 조각의 경계란 바로 좌대인데, 좌대가 예술적 오브제의 공간과 일상의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최지영은 조각의 좌대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되 이 경계로서의 좌대의 역할을 유연하게 변형시킨다. 그에게 좌대란 예술과 일상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경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양자의 구분을 재고하는 역할을 한다. 인체의 발뒤꿈치에 겨우 달려 있는 듯한 육면체의 좌대, 널브러진 인체를 받치고 있는 바닥과도 같은 좌대, 인체가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좌대, 인체를 막아선 장애물과도 같은 좌대 등 최지영의 작품 속 좌대는 조각적 공간과 일상적 공간을 뚜렷하게 구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서로 다른 공간들이 겹치고 침범하는 문턱의 역할을 한다. 그에게 좌대라는 조각 장르의 경계는 버팀목이자 장애물이고, 외부의 침입이자 내부의 외출이 남긴 흔적과도 같다. 이와 같은 독특한 좌대의 역할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여러 의미의 ‘경계’와 매우 밀접하게 공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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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경계(境界)의 또 다른 동음이의어로 경계(經界)를 들 수 있다. 전자가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라고 한다면, 후자는 특히 그 한계가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한계로 작동하는 경우를 뜻한다. 사물을 특정한 기준에 따라 분간하는 한계는 결국 가치를 판단하는 한계로까지 이어진다. 즉, 사물에 대한 인식론적 판단의 경계는 선악을 가르는 가치론적 판단의 경계로까지 가닿는 것이다. 내부인과 경계인, 우리와 그들, 이편과 저편, 동일자와 타자의 구별은 순수한 차이에 근거를 둔 구별이기는커녕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쉽사리 전이된다. 이주민, 소수자, 노약자 등 이른바 타자들은 단지 낯선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악하고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에 근거를 두고 일상적인 폭력이 쉽사리 정당화된다. 그 폭력은 실질적으로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을 비롯하여 시선을 통한 감시의 폭력, 언어를 통한 차별적 폭력을 포함한다. 최지영의 설치작품 <경계(經界)>가 보여주는 것이 이런 일상적 폭력의 장면이다. 높은 좌대에서 으름장을 놓는 여성의 모습, 벽의 뒤편에서 매 순간 감시를 늦추지 않는 남성의 모습, 구석으로 내몰린 인물의 모습, 비탈에 널브러진 인물의 모습이 가해와 피해로 엮인 일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들도 역시 모두 벌거벗은 인물들이다. 그런 까닭에 폭력의 가해자도 폭력의 피해자도 모두 동등한 존재의 자격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누구든 알게 모르게 타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누구든 돌연히 타자로 내몰려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최지영은 벌거벗은 조각상을 통해 이 폭력의 일상성을 뒷받침하는 선악의 경계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우연한 것인지 되묻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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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런 선악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와 우리와 다른 너와 그들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를 선으로 자처하는 잘못된 도덕의 논리를 깨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긍정을 획득하는 거짓된 긍정의 속임수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런 잘못된 선악의 논리, 부정을 통한 허구적인 긍정에 물들지 않은 아이의 관점을 요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경계(經界)>를 구성하는 한 아이의 조각상에 주목해야 한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아직 내면화하지 않은 이 아이가 일상적인 폭력의 장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아이는 조만간 사회의 경계를 받아들여 폭력의 주체나 대상이 될 운명을 상징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경계의 논리, 타자를 부정하는 집단의 생리를 해체할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가? 이것이 최지영이 경계의 여러 의미들을 경유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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